「친민」은 맹자 「친친인민」의 말이라.
「친민자는 그 천지만물일체의 용을 달하는 것이다.」
爱问:「『在亲民』,朱子谓当作『新民』,后章『作新民』之文,似亦有据。先生以为宜从旧本作『亲民』,亦有所据否?」
先生曰:「『作新民』之『新』,是自新之民,与『在新民』之『新』不同,此岂足为据?『亲』字犹『亲民』犹孟子『亲亲仁民』之谓。亲之即仁之也,百姓不亲焉,虞舜使契为司徒,教以人伦,所以亲之也。《大学》之所谓『亲民』者,亦教之以人伦、使之自新,以复其本然之善而已,非有改于其外也。」
애가 여쭈었다. "『친민(親民)에 있다』고 했는데, 주자는 『신민(新民)으로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뒷장의 『새로이 민을 만든다(作新民)』는 글도 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구본(舊本)대로 『친민』이라고 하시는 것도 근거가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새로이 민을 만든다』의 『신(新)』은 이는 스스로 새롭게 하는 민이니, 『민을 새롭게 한다』의 『신』과 같지 않다. 이 어찌 근거가 되랴. 『친(親)』자는 곧 맹자의 『친을 친히 하고 민에게 인을 베푼다』는 말이다. 그들을 친히 하는 것은 곧 그들에게 인을 베푸는 것이다. 백성이 친하지 않으니, 우순(虞舜)이 협(契)을 사도(司徒)로 삼아 인륜으로 가르친 것이 곧 그들을 친히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말하는 『친민』이란 또한 그들에게 인륜을 가르쳐 스스로 새롭게 하여 본연의 선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니, 그 외부를 고치는 것이 아니다."
좋은 교육은 「친히 하기」이지 「새롭게 하기」가 아니다 — 학생들을 당신이 원하는 형태로 transform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가 이해하고, 선천적 potential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친민」의 pedagogy이다.
「『새로이 민을 만든다』의 『신(新)』은 스스로 새롭게 하는 민이다.」
양명은 주자 논증의 결함을 지적한다: 『강고(康誥)』의 「작신민(作新民)」은 주공이 강숙에게 은나라 민중을 자신하게 하라는 경계이며, 「신」은 동사 「자신하게 하다」이다. 주자가 『대학』의 「친」을 「신」으로 바꾼 것은 두 「신」의 문맥과 의미가 다르다.